ㅇ 언제 : 2018.4.22(일)
ㅇ 어디 : 광화문~경복궁~감고당길~낙원동쪽
이순신장군 동상이다
광화문에는 어느 순간 이념의 농성장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만약 책임자라면 광화문에서는 그런 이념에 관련된 시위는 못하도록 하고
단지 문화공연등과 관련된 행사만 할 수 있도록 해서
그 공간을 오로지 우리 시민들이 건전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1.근정전, 2.수정전, 3.경회루, 4.사정전, 5.강년전, 6.교태전, 아미산 굴뚝, 7.동궁,
8.소주방, 9.자경전, 10.향원정, 건청궁 11.집옥재, 12.태원전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이다.
위로는 백악산에 기대어 터를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대로)가 있었다.
정도전이 지은 경복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4년(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 경복궁에는 왕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외전과 궐내각사들,
왕과 왕비 및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전각들,
휴식을 위한 정원등 500여동의 건물들이 조성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주로 외국인들이 우리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유화문(維和門)은 경복궁 홍례문과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勤政門)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에 있는 문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근정"이란 이름에는 '천하의 일을 잘 다스리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복궁을 상징하는 대표적 상징적 건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다.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과거 및 외국 사절의 접견등 국가의 공식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오늘날 근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것을 고종4년(1867년)에 중건한 것이다.
근정전 마당의 품계석
근정전에 오르는 하월대 답도
근정전에 오르는 상월대 답도
사정전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으로 최고 통치자인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하가 매일 왕을 배알하던 약식 조회인 상참을 비롯하여
경연, 윤대등 일상적인 국정운영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사정전은 고종 4년(1867년) 중건한 것이다
향오문은 사정전 뒤에 있으며 향오문을 들어서면 강녕전이 있다.
강녕전은 왕의 일상생활 공간인 침전이다.
이곳에서 왕은 독서와 휴식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료들과 편안히 만나 국정 현안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고종2년(1865년) 중건되었다.
1917년 화재로 창덕궁 희정당이 소실되자 희정당 중건을 위해 옮겨졌다.
지금 강녕전은 1995년 복원한것이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1395년 경복궁의 창건 때 임금의 침전으로 건립되었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 연침(延寢)이었고
경성전은 서소침(西小寢), 연생전(延生殿)은 동소침(東小寢)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방향은 동향이다
경복궁 연생전(延生殿)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1395년 경복궁의 창건 때 건립되었다.
내전이자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에 부속된 건물이며
강녕전의 동쪽에 위치하는 작은 침전을 뜻하는 동소침(東小寢)으로 지어졌다.
강녕전의 좌측 서쪽에는 서소침(西小寢)인 경성전(慶成殿)이 나란히 지어졌다.
건물은 강녕전과 직각을 이루고 방향은 서향이다
연길당은 강녕전(康寧殿)에 딸린 부속건물이며 위치는 강녕전 우측에 있다.
응지당(膺祉堂)과 좌우 짝을 이루는 건물이다.
연길(延吉)이라는 이름은 복을 맞아 들인다는 뜻이며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지어졌다.
강녕전은 응지당과 연길당 외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이 있어
5채의 침전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의 건물들은 임금이 거처하는 건물이며,
침전으로 사용하거나 신하를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양의문은 강녕전 뒤에 있는 문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이곳에서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궐안의 살림살이를 총 지휘하였다.
세종 22년(1440년)경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러 전소되었다가 고종 2년(1865년) 중건되었다
함원전은 경복궁 교태전 서쪽에 위치하는 전각이다.
세종 때 불상을 모셔두고 불교의식과 행사를 열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는단종이 머물렀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복원하기 위해 이건되었다가
1995년 제자리에 다시 중건되었다. 함원(含元)은 원기(元氣)를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조성된 정자이다.
연못인 향원지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다
신무문이다. 저 앞에 보이는것이 청와대이다.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문(北門)이며 세종(世宗) 재위 15년인 1433년에 건립되었다.
신무문(神武門)이 건립되자 동쪽의 건춘문(建春門),
서쪽의 영추문(迎秋門), 남쪽의 광화문(光化門)과 함께 비로소 경복궁의 4대문이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4대문의 각 명칭은 세종이 집현전에 명하여 지었다.
경복궁안에서 신무문방향을 보고 좌측이다. 전에는 이곳에 군 부대가 주둔하였던 곳이다
위 사진과 같이 군 부대가 주둔하였던 곳이다
건청궁은 향원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종10년(1873년0에 건립되었다.
왕의 처소인 장안당,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옥호루로 이우러졌으며
고종32년(1895년) 을미사변때 명성왕후가 살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융희3년91909년) 훼철된 후 1939년 조선총독미술관이 들어섰으며 2007년에 복원하였다.
옥호루
함광문뒤로 옥호루가 보인다
자경전은 고종4년(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지은 것이다.
조대비는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소주방은 조선시대 왕의 수라와 잔치 음식을 준비하던
궁중 부엌으로 태조 4년(1395년)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때 철거된 것을 2015년 복원하였다
자선당은 왕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서 자선은 어진 성품을 기린다는 뜻이다
비현각은 공부도하며 정무도 보던 곳이다
집경당은 향원정(香遠亭) 남쪽에 남은 전각이며 경복궁 내전(內殿)의 침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정면 9칸, 측면 2칸이며 좌측과 우측에는 누마루를 설치했다.
함화당은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남쪽에 남은 전각 중에 내전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서쪽은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함화당은 집경당과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회루
경회루
수정전은 고종 4년(1867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궐내각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세종때에는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이곳에 있었다.
경복궁 우측에는 약 60~70년대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광화문을 나와서 삼청터널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찍어본다
동십자각에서 조금 가다보면 건춘문이 나온다
동십자각이다
동십자각은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궁궐의 망루였다.
이 목조누각은 1867년(고종 4) 경복궁 복원 당시에 세웠으며,
동십자각에는 원래 망루를 오르는 계단이 있었고 경복궁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망루의 기둥은 하방(下枋)과 창방(昌枋)을 매우 간단하게 돌렸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벽채가 없이 트였다.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앞으로 길이 나면서 경복궁이 훼철되었고
길 한가운데 동십자각만 달랑 남게 되었다.
현재는 사직로와 삼청로가 만나는 길 가운데 위치한다.
동십자각 우측에서 광화문쪽을 보고 찍어보다
감고당길이다. 서울에도 이런 아늑한 거리가 있나 할 정도로 한적하다.
휴일이라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거닐고 있다
감고당길을 걷다보니 화단에 이런 꽃들이 잘 심어져 있다
감고당길을 조금 올라가다 보니
덕성여중,고가 길 좌우로 위치하고 있고 이어서 이런 먹거리 식당들이 나온다
헌법재판소앞을 지나 이제 낙원상가쪽으로 가다보면 운현궁이 나온다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로서,
생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10여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정치를 했다.
1864년(고종1년)에 노안당과 노락당을 짓고 1869년(고종6년)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을 별당으러 쓰였다
운현궁에서 낙원상가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등학교가 나온다. 교문앞에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교동초등학교 정문
낙원상가에 가면 정겨운 식당들이 많다.
구수한 우거지해장국이 2000원이다.
맛도 일품이다. 출출한 시장기를 한그릇으로 해결한다
이 식당도 선지해장국이 2000원이다.
이곳은 주로 노인분들이 많이들 오시는것 같다. 그러나 일부 젋은 분들도 많이 보인다
'걷기운동 및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덕여대-천장산-의릉-외국어대를 다녀오다 (0) | 2018.04.29 |
---|---|
안암동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가보다 (0) | 2018.04.28 |
A6000의 AEL 기능을 시험해 보다 (0) | 2018.04.18 |
아파트에서 찍어보다 (0) | 2018.04.15 |
경희대 캠퍼스에 가보다 (0) | 2018.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