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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언제 : 2018.  8.  5(일)  15 : 45 ~ 18 : 30

어디 : 창 경 궁 , 창 덕 궁



최초 창경궁으로 들어가서 화살표가 있는 함양문으로 해서 창덕궁으로 들어간 후 돈화문 옆 금호문으로 나왔다



◆ 창  경  궁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3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 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 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진것이다


◆ 창  덕 궁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왕실정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왕실정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창경궁 전경

창경궁 지도이다.

(1) 홍화문 (2) 옥천교 (3)명정전 (4) 숭문당  (5)문정전  (6)통명전  (7)경춘전  (8)집복헌과 영춘헌  (9)환경전

(10)자경전 터  (11)춘당지  (12) 대온실  (13) 자생화단  (14) 관덕정  (15) 월근문

(16) 함춘원 터 (17)함양문 (18)성종대왕 태실비 (18)팔각칠층석탑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며 1484년에 건립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6년에 중건했다

먼저 서울대병원 앞에 위치한 창경궁 홍화문으로 들어갔다.


창경궁 홍화문을 들어서면 옥류천을 가로지르는 옥천교이다

저 앞에 보이는 문은 明政門(명정문)이다


▲ 창경궁 명정전 일원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명정문이다


홍화문을 지나 명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명정전이 있다.




명정전이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명정전은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명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명정전 내부 모습이다.


명정전 창틀이다. 못을 하나도 박지 않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보수하느라 그런지 못이 몇개씩 보인다


창문틀을 가까이 담아본다.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정말 아름답다.

이 문양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프랑스에서 문양 특허를 등록했다고 해설사께서 말씀하신다.


명정전 바로 좌측에 있는 문정전으로 가는 통로이다

문정전으로 행차시 비를 맞지 않도록 지어졌다


저 앞에 사람들이 있는 건물이 명정전 바로 좌측에 있는 문정전이다.

문정전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명정전앞에 있는 드므이다. 드므는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써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예방을 위해 상징적으로 설치했다고 한다


▲ 창경궁 문정전

문정전이다.


숭문당은 명정전 바로 뒤에 있으며 주로 왕이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빈양문(賓陽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뒤편에 위치한 문으로

내전(內殿) 영역으로 진입하는 정문이다


명정전 내부로 들어가는 빈양문이다


▲ 창경궁 숭문당과 함인정






숭문당은 명정전 뒤에, 빈양문 우측에 있는 건물이며 주로 왕이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할때 사용했다고 한다.


창경궁 함인정(涵仁亭)이 있는 자리는 성종 때 건립한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고 그 자리에 인조가 함인정을 건립한 것이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을 떠났다가 창경궁으로 돌아와 지은 전각인데

인왕산 아래 있었던 인경궁에 있는 함인정을 헐어 이곳에 옮겨와 지은 것이다. 

1633년에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인 1830년 창경궁에 화재가 나 전소되었으나

1833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아홉칸의 팔작지붕이며 화려한 단청으로 채색되어 있다.

조선시대 임금들이 편전으로 사용했다.



함인정이다.



▲ 창경궁  경춘전과 환경전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이다

경춘전은 왕비의 산실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어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환경전은 1484년 성종 때 창경궁이 창건되면서 임금이 거처하는 침전으로 건립되었다.

통명전(通明殿), 경춘전(慶春殿), 양화당(養和堂)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內殿)을 구성하는 건물이다.

1544년 중종(中宗)이 환경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 창경궁 통명전과 양화당





 통명전이며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중심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통명전은 들어가면 마루로 되어있고 그 좌.우에 왕비의 침전이 있다.

통명전 마루는 관람객들이 들어가서 앉을 수 있었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통명전 우측(동쪽)에 있는 양화당이다.

 통명전(殿)에서 생활하던 내명부()의 수장들이 접대 공간으로 사용한 건물로 추정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하였으며,

1878년(고종 15)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가 승하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 재건되었으나

 이후에도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1834년(순조 34) 재건된 후 오늘에 이른다.


▲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좌측건물이 집복헌이고 우측 튀어나온 건물이 영춘헌이다.

이곳은 후궁들이 생활했던 영역이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하였고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고 이곳에서 승하하였다고 한다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좌측 건물은 양화당

우측건물은 집복헌이다


▲ 창경궁 풍기대와 앙부일구

위 사진에서 계단을 올라가 우측으로 가면 풍기대와 앙구일구가 있다


풍기대이다. 기를 달아서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하였던 기상관측 기구이며

18세기에 설치된것으로 추정된다


앙부일구 즉 해시계이다.




내전터일대 및 춘당지로 가는 길이다


▲ 창경궁 내전 터




내전터는 궁궐내 여성들이 생활했던  구역인데 건물들이 일제 강점기때 사라졌다고 한다


▲ 창경궁 춘당지 일원





춘당지이다.

원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다.

위에 보이는 춘당지는 1983년 새롭게 조성된 춘당지이다.

원래 이곳에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논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춘당지옆에 7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중국에서 만들어진것을 일제강점기때 상인으로 부터 구매하여 세운것이라고 한다


이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이다. 연못이 조그만하다


▲ 창경궁 성종 태실 및 성종태실비





태실은 왕자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고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태실은 전국의 명당 자리에 흩어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때

이것을 전부 모아서 서삼릉에 모았고 그 과정에서

상태가 양호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 창경궁 자경전 터

이곳이 자경전 터이다.


▲ 창경궁 대온실

대온실은 1909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 간 것과 때를 맞추어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이는 조선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목적이였다.

※ 대온실에 있는 꽃들은 제일 마지막 부분에 나열한다


▲ 창덕궁 지도

(1) 돈화문 일원  (2) 인정전 일원  (3) 선정전 일원  (4) 희정당

(5)대조전 일원  (6)성정각 일원  (9) 낙선재 일원  (16)후원입구


이제 창경궁을 전부 관람하고 창덕궁으로 가는 입구이다.

이곳에서 또 입장권을 구매서 들어가야 한다

우측에 보이는 문이 함양문이다


▲ 창덕궁 성전각 일원(세자가 생활 하는 곳)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들어오면 도로 좌우에 성정각 일원이 있다.

성정각은 세자가 생활하는 곳이다.

위 그림에서 우측에는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가 있고

가운데에는 중화당이 있었으나 현재는 다 소실되었다

그리고 좌측에는 성정각이 있다

왕세자가 머물던 성정각은 아름다운 2층 누각으로,

원래 1층 건물이었는데 훗날 동쪽 부분만 2층으로 늘려 지었다고 한다.

성정각은 일제 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사용되었다.

성정각 마당에는 약재를 만들 때 썼던 절구가 남아 있고.

성정각 건너편에는 왕세자의 서고와 도서실이었던 승화루가 있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들어오니 바로 우측에 자시문이 보인다

이 자시문은 과거 중희당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문인데 중희당이 없어지면서

성정각의 동쪽 출입구가 되었다.

성정각은 세자가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성정각의 출입문인 영현문이다


성정각내에 있는 보춘정이다.

성정각(誠正閣)은 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으로

보춘정(報春亭)이라 불린 2층의 누(樓)와 연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정각내에 있는 건물이다.

좌측의 현판은 조화어약(調和御藥)으로 임금이 드시는 약을 짓는다의 뜻이고

우측 현판 보호성궁(保護聖躬)은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


▲ 창덕궁 희정당(왕의 침실이 있는 곳)





희정당이다. 저 안쪽에 "희정당"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희정당은 초기에는 왕이 잠을 자던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편전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희정당도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세 차례나 화재를 당했고, 지금의 건물은 네 번째로 지은 것이다.



옆에서 본 희정당이다

원래는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였는데 연산군대에 희문당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왕의 침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여춘문이다.

여춘문은 대조전과 희정당 동쪽 중간에 남향으로 난 문이다.




▲ 창덕궁 대조전 일원(왕과 왕비의 생활공간)






선평문이고 안에 대조전 현판이 보인다

'선평문(宣平門)'은 대조전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며 희정당과 통한다.


대조전은 희정당 뒤편에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공간이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키던 곳이기도 했단다.

‘크게 만든다’는 뜻의 대조전이란 이름은 국가의 기틀을 이어 가는 세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

국가와 백성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대조전에는 처음에 왕비가 머물다가 훗날 왕과 왕비가 이곳에서 잠자리에 들었단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단다.

부부라면 당연히 같은 방을 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조선의 왕과 왕비는 잠자는 곳이 달랐다고 한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어떤 건물보다도 수난이 많았던 건물이였다.

수차례나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이 어전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되었고,

519년이란 긴 역사를 자랑했던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는등

대조전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창덕궁 낙선재일원(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낙선재는 헌종 1847년 김재창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중희당 동쪽에 낙선제, 석복헌, 수강재등을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신곳이라 한다.

낙선재 일원에는 출입문으로 장락문, 중화문, 소금마문이 나있다

또한 낙선재에는 비운의 마지막 황태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영친왕이 머물기도 했다.

고종의 7번째 아들이었던 영친왕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 왕족인 이방자(일본 이름은 마사코예요) 여사와 결혼했고.

독립 후 1963년 귀국하여 이곳에서 살다 생을 마감하였다


낙선재이다. 뒤편 좌측에 상랑정이 보인다


낙선재 일원을 멀리서 잡아본다


▲ 창덕궁 후원 입구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러나 이곳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들어가지 못한다


▲ 창덕궁 선정전





선정전이다.

 선정전은 편전으로 사용하던 곳이며 선정전은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지붕이 청색 기와로 되어 있다.

당시에 청색 기와는 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왕이 나랏일을 보던 선정전만 청색 기와를 덮은 것이라고 한다

 훗날 희정당으로 편전을 옮긴 이후에 선정전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선정문 현판이 보인다



우측 출입문이 선정문이고 좌측 우뚝 솟고 소나무에 가려있는  건물이 인정전이다


▲ 창덕궁 인정전 일원





인정전이다

1609년 재건된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조회, 외국사신 접견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행한곳이란다.


인정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개의 문이 있다.

진선문과 숙장문으로 들어가서 최종적으로는 인정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인정전 내부이다. 왕이 앉으셨던 의자이다.

조선시대 왕의 권위를 느껴볼 수 있다.


인정전이다.


인정문이다



숙장문이다


멀리서 찍은 숙장문이다



인정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선문이다


진선문에서 나와서 멀리서 진선문을 담아본다


진선문을 나와서 시내 방향을 보고 찍어 본다







▲ 창덕궁 돈화문 일원






신하들이 출입했던 금호문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며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만 사용했다고 한다




▲ 창경궁 대온실내  꽃 모음












































짧은 시간에 창경궁과 창덕궁일원을 돌아보았기때문에

자세하게 보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아쉽다.

다음 기회에는 더 충분한 시간을 내서

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돌아보고 싶다


그래도 1973년도에 가보고는 두번째로 가보는 궁궐 답사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기고 또 일부는 슬픈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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