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을 읽는데 "어느 시어머니의 주례사"가 나온다.
통상 신랑 아버지가 주례사를 하는데 여기는 시어머니가 주례를 한다.
혹시 신랑 아버지가 안계신가? 좌우간 호기심이 발동해서 한번 읽어 보았는데.
읽고난 후 비로소 왜 시어머니가 주례사를 했는지 그 이유도 알게되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아주 재미있어서 혼자 낄낄대며 읽었고 다 읽은 후에는 와이프한테 한번
읽어보라고 전해 주었다.
요즘같이 살아가기 팍팍한 시기에 그래도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이곳에 그 기사 내용을 담아본다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어느 시어머니의 주례사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랑 김보통군의 어머니 나목자라고 합니다.
꽃구경 가기 딱 좋은 계절에 귀한 시간 쪼개어 이 자리에 와주신 하객 여러분께 큰절을 올립니다.
더불어 신부 최으뜸양을 서른두 해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길러주신 사돈 내외분의 열정과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주제 넘게도 제가 오늘 단상에 오른 것은, 요즘 트렌드가 주례 선생을 따로 모시지 않고 양가 혼주가 축사를 하는 것으로
바뀐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함이요,
MBTI가 왕소심형인 제 남편 김삼식님이 혼사를 무르면 물렀지 죽었다 깨도 축사는 못 한다 우기는 통에,
나이 먹어 느는 건 뱃살이요, 맷집일 뿐인 제가 용기를 내본 것입니다.
가방끈 짧고, 글이라고는 학창 시절 반성문 써본 게 전부라 곳곳이 지뢰밭일 터이나,
적당히 헤아려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더러 타 부모님들 주례사를 베낀 부분도 있으니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으뜸아, 이제부터 내 아들 김보통은 공식적으로 너의 것이다.
중딩 때부터 누나, 동생 하며 십수년을 보아온 사이이니 안팎으로 품질 검증은 마쳤으리라 본다.
김연아의 고우림만큼은 아니어도 세 살 연하면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 아니더냐.
혹시 살다가 하자가 있더라도 중고라서 반품은 어려우니,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네가 잘 닦고 조이고 수리하여
사용하길 바란다.
너 역시 시진핑의 시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고, 시금치·시래기·시오야끼는 입에도 안 대는 MZ세대 며느리이겠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친정은 한 번이라도 더 가고 시댁은 웬만한 일 아니면 오지 말아라.
1년에 다섯 번 조상님 제사 치르다 고관절 내려앉은 내가 시어머님 운명하시자마자 내린 결단이니 빈말이 아니다.
정 와야겠다면 시어미 손에 물 묻힐 생각 말고 너희 먹을 건 알아서 사오너라.
당일치기로 오되 해지기 전에 올라가라. 생일에도 올 필요 없다.
너희 시아버지 계좌번호를 찍어줄 터이니 용돈이나 두둑히 입금해라.
아들보다 연봉 높은 며느리 덕에 그 양반 평생 소원인 캠핑카라도 사게 될지 누가 아느냐.
혹 2세를 낳을 계획이거든 가사 육아 분담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라면 하나 못 끓이는 제 아버지 전철을 밟을라, 내 아들은 초딩 때부터 붙잡고 가르친 덕에 돌판 위에서도 달걀말이를
똑 떨어지게 부칠 줄 안다. 차돌박이 넣고 끓이는 김보통표 청국장은 백종원도 울고 갈 맛이다.
결국 너 좋은 일만 시킨 셈이다.
일은 절대 놓지 말거라. 여자의 말발은 경제력에서 나오는 법. 그렇다고 유리 천장까지 뚫으란 소리는 아니다.
그저 얇고 길게 가는 게 워라밸엔 최고다.
아, 너는 시금치가 싫겠지만 우리 아들은 시금치바나나 주스를 제일 좋아한다.
뽀빠이라고 들어봤지. 내 아들만 튼실해지는 게 아니라 너의 밤도 행복해질 것이다. 진짜다.
#
내 아들 보통아, 드디어 널 떠나보낼 때가 됐구나. 훌쩍~ 눈물 아니고 콧물이다.
남자가 결혼해 행복하게 오래 사는 길은 보증 서지 않고 주식 하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는 것이다.
술을 먹어도 열두 시 전에는 반드시 귀가해라. 자신의 과오를 나이 육십에 깨닫고 땅을 치는 너희 아버지 절규이니
믿어도 좋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아들은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 및 분리 수거도 하겠지만,
허리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퇴근해 집안일 도맡아 하다가 허리 나간 내 친구 아들들 여럿 봤다.
사랑은 그저 퍼주는 게 아니라 받기도 하는 것. 골병 들면 너만 손해다.
가까운 미래에 하늘이 점지할 귀한 선물은 사돈댁에 드려도 우리는 섭섭하지 않겠다.
아들도 갖다 바쳤는데 그깟 손주가 대수랴. 다만, 자식은 막 키우는 게 정답이다.
너의 경우에서도 증명되었듯, 자식은 절대 부모 뜻대로 자라지 않는다.
삶이 서러우면 전방으로 끌려가던 군용 열차 안에서 차디찬 도시락을 눈물에 말아 먹던 날을 기억하라.
허리까지 쌓인 눈 치워가며 철책선을 지키던 혹한의 밤들을 소환하라.
설움과 흔들림의 나날들을 바위처럼 지켜낸 너희들의 우정과 연대를 나라가 줬다 뺏은 가산점에 비할쏘냐.
바닷가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두 남녀가 만난 건 우주의 기운이 아니면 불가했을 일.
모쪼록 시련이 닥칠 때 손 꼭 잡고 서로의 편이 되어주거라.
사랑보다 믿음을 귀히 여겨라. 모든 걸음을 함께 걸으며 세상 풍파와 싸워 이겨라.
부러우면 진다는데, 오늘 너희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도록 백년해락 하되, 남는 참깨는 택배로 보내주기 바란다.
중국산 말고 국산으로. 사랑하고 축복한다. 끝!
<2023.3.28 조선일보 A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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