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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남 아산시 선장면에서 1954년에 태어났다.

그 당시 아버님이  수리조합장을 하셔서 그 사택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약 4~5살 정도까지 살은것 같고.

그때는 너무 어려서 희미한 기억만 있을뿐 자세한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이제 곧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누님과 형님들,동생과 같이 예산 대술면 방산리로 가서 부모님께 성묘를

드리면서 우리가 살았던 곳도 더듬어 찾아 보았다.

 

선장면에서 4~5세까지 살다가  도고면으로 이사와서 내가 학창시절까지 살았던 집터도 찾아가 보았다.

어렸을때는 그리 크게 보였던 마을과 밭들이 지금은 너무 조그맣게 보인다.

도고면 신언리 밤나무골~ 그때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을 따 먹곤 했었는데~~

90년대 초 자식들이 결혼해서 전부 서울등으로 가서 살다보니

아버님은 집과 밭, 논등을  전부 팔아서 천안으로 이사하셨는데

이날 그곳에 가보니 우리가 살았던 집은 없어지고 밭도 농작을 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당시 기억으로는 무우, 배추, 콩, 고구마, 감자, 가지등등 여러가지를 재배를 해서

그것으로 어머니께서 맛있게 조리를 해주시면 그것이 꿀맛 같았는데~~

또한 그당시에는 간식거리가 없으니 무우를 뽑아서 즉석에서 손으로 껍질을 벗겨서

바로 먹기도 하고 가지를 따서 생으로 먹기도 하고~~

그리고 학교갔다 오면 어머님이 고구마등을 쪄서 부엌 무쇠밥솥에 넣어 두시면 부뚜막에 앉아서

맛있게 먹었던 추억도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그곳 5가구가 살았는데 이사들 가시고 3가구만 남았는데 한집 아주머니께서는 치매로

전혀 기억을 못하신다. 그 분 아들은  내 동생 친구라 그 친구와 옛날 대화를 나눴을뿐~~

역시 고향이 시골인지라  이렇게 오랜만에 가도 만날 사람이 있다는것은 다행이다~~

 

그곳에 들렸다가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로 가서 부모님께 성묘를 드리고 그곳 친척분들 뵙고 왔다.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아버님 손을 잡고 도고면 집에서 대술면 방산리까지 걸어갔던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다리가 아프던지~~ 그당시는 그곳까지 가는 버스도 없었으니 오직 걸어서 가는 수 밖에~~

 

옛날에는 예산 대술면 방산리는 엄청 오지였고

6.25전쟁때도 그곳에는 북괴군들 모습을 찾아볼 수 도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1919년 태어나신 아버님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니

경제적으로 엄청 어려울 수 밖에~~

 

그럼에도 그곳 오지에 계속 있으면 두 여동생(나에게는 고모)들 학교문제도 있고 해서

아산시(온양온천)으로 이사를 가셔서 그곳에서 당신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면사무소에 소사로 들어가셔서 성실히 일하시다 보니

나중에는 9급공무원인 면서기로 임명되어 근무하셨단다.

 

그곳에서  결혼도 하시고  어렵게 사시면서도 고모들 학교도 보내시고~~

그당시 학교갔다 온 고모들을  저녁에는 직접 공부를 가르치셨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렸을때 보면 고모들이 아버님을 엄청 존경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님이 온양온천 면서기로 근무하실때  면장님이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아버님이 가난하지만

똑똑하시고 하니  당신 따님과 결혼을 시키셨고  그러면서 경제적으로 많이 지원해주셨다고 한다 ~~

우리가 어렸을때 보면 아버님은 일본말을 무척 잘 하셨고 또 일본방송을 많이 들으시곤 하였으며

그래서인지 왜정시대때 외사촌형이 동경대 치의대 시험보러 갈때 아버님께서 데리고 가셨단다.

이런것 보면 우리가 10여년 영어 배웠어도 회화를 제대로 못하는것 보면 참 창피한 일이다

 

그리고는 내가 태어나던 시기에 아버님께서는 아산군 선장면 수리조합장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도고면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나는 초등학교-고등학교까지 다녔고

나는 73년초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어 그 이후로는  집을 떠나서 살게 되었다.

우리 학교다닐때만해도 고등학교 졸업생중 약 18%만 4년제 대학에 갔다고 하니 촌에서

그래도 운이 좋은 놈인가보다.

 

초등학교 4학년때인가 우리 반에 서울에서 여학생이 한명이 전학왔다.

얼굴도 예쁘게 잘 생겼고 옷 입은것도 무척 세련되게 입었고 똑부러지는 서울말씨,

촌놈인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으며 그런 여학생의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좋아하기는 했었지만.

표현도 못하고 또 그 여학생 앞에만 가면 수줍어서 얼굴이 빨갛게 된것 같다.

 

그때 그 여학생이  입었던 옷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인데 스타킹이 팬티과 연결되어 있었으며(팬티 스타킹).

그런 옷을 입은 여학생의 모습을 난생 처음 보고 세상에 저런 옷도 있나?? 모든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저녁 5시가 되면 라디오에서 어린이 방송이 나오는데 서울 초등학생들이 나와서 동요를 부르는 것인데

얼마나 또박또박 말을 하고 노래는 얼마나 잘하는지~~  그 이후로 서울은 나한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드디어 초등학교 6학년때  난생 처음 1박2일로 처음으로 서울로 소풍을 갔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서 아마 지금 종로 2~3가 되는것 같은데 그 부근 여관에서 1박하면서.

전차도 타보고 창경원, 덕수궁, 남산등도 올라가보고~~ 모든것이 신기햇다.

그리고 마지막날 막차를 타기위해 서울역 광장 땅바닥에 앉아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우측 건물 옥상에서 한 할머니가 부라더미싱을 돌리는 네온사인 나왔다.

실제 재봉틀이 돌아가고 할머니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던 시골 소년의 그때  모습은 잊을 수 가 없다.

 

중학교는 예산으로 기차통학을 했는데 다른 과목은 자신 있었지만 영어가 제일 힘들었다.

to 부정사가 어떻게 명사적, 부사적, 형용사적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을 몰랐고

또 현재분사와 동명사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당시에는 참고서도 제대로 없었으니~~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고^^

그래서 밤에  집에서 혼자 공부하다가 도무지 몰라서 답답한 마음에 혼자 울기도 했었다.

그렇게 하다가 중3때인가 영어를 잘하는 친구가 "정통 중학 영어"를 보고 있어서 나도 그 책을 사서 읽어보니

알기쉽고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서 그때서야 감을 잡았었던 추억~~

 

중학교 3학년때는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전부 받았다. 나는 통학을 하다보니 마지막 수업을 들을때 

집에 가는 기차 시간이여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수업을 듣다가 기차시간이 되면

조용히 나가라고 하신다. 아마 내가 착실한 학생이였으니 나를 믿고  선생님께서도 허락을 해주신것 같다.

 

내가 영어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해서 내 동생은 내가 영어 참고서등을 잘 챙겨주고 지도를 해줘서

동생은 어렵지 않게 영어를 공부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통상 고등학교를 주로 천안공고나 예산농고, 천안농고등으로 보낸다.

나는 아버님이 인문고를 보내셨다. 서울로 가기에는 형편상 어렵고 그 당시 기차로 약 1시간거리에 

있는 천안으로 통학을 하면서 3년을 다녔다. 기차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니

기차안에서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곤하면서~~

 

새벽에 어머님이 해주신 밥을 먹고 첫 열차를 타고 천안역까지 가서 학교까지는 또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그리고 보충수업이 끝나는 저녁에는  서울에서 오는 완행열차를 타고 집에 왔는데 열차가 항상 연착하다 보니

밤에 되어서야 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한창 왕성할때인데 늦게 먹다보니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그리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또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면서 3년을 보내게 되었으며

이런 모습은 나혼자 그런것이 아니고 그 당시 우리 세대의 학생들은 전부 그렇게 지낸것 같다.

 

이번에 시골에 가보니 우리 학교다닐적에는 가까이에 도고온천역이 있었는데 순천향대학교가

신창쪽에 있어서그런지 철도  노선이 그쪽으로 변경되어 있어서  이곳은 발전이 되질 못한

옛날 상태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았던 곳에 쌀가마를 쌓아 놓았던 큰 대형창고가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그 창고를 리모델링해서 커피 shop으로 바꾸어져 있었고 그 앞에는 차량들이 많이 세워져있었고

주로 외지 손님들이 많이들 찾아 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곳에 들어가서 커피와 빵을 주문해서 먹었다. 그 옛날 어릴때 추억을 생각하면서~~~

▲ 아산시 도고면 신언리에서

우리 큰 형님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이 우리 집이 있었던 집터이고 그 좌측 및 아래가 밭이였다.

지금은 경작을 하지않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모습만 보인다

바로 앞은 밭이였고 그 뒤 약간 높은 부분이 집터였다. 좌측도 밭이였고~~

▲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이곳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는 한산 이씨 집성촌이다.

아버님도 이곳에서 1919년 태어나셨고 성장하신 곳이라 돌아가신 후 부모님 두분을 이곳에 모셨다.

부모님께 성묘드리고 나와서 친척댁에 들린다. 

이곳에는 아계(이산해) 할아버님의 산소와 영당이 있고 나는 아계할아버님의 14대 손이며. 

90년대에 한번 성묘를 드린적이 있다.

▲ 예산 예당저수지 

대술면 방산리에서 나와서 예산 예당저수지옆에 있는 산마루가든에 가서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래 전에 이곳에 와서 어죽을 먹엇는데 역시 맛있었고 이 날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예당저수지 모습

산마루가든 식당내부

 

우리가 먹은 메기 매운탕~~ 맛있었다

▲ 아산시 도고면 신언리

점심을 먹고 다른 형제들은 이곳을 들르지않고 바로 예산으로 가셔서 다시 이곳 도고면으로 왔다. 

저 주민센터 건물 뒤가 내가 살던 곳이였고 이 주민센터 자리도 우리 밭이였는데

이곳에  그 당시 도고면사무소 건물이 세워졌었다.

지금은 도고면사무소는 도고온천초등학교 옆으로  이전했고 이곳은 주민센터가 된것 같다

 

쌀가마를 쌓아 놓던 창고가 이렇게 카페로 바뀌었다.

카페명은 도고창고~~

카페 내부~~  맛있는 빵과커피를 주문해서 먹어본다

2층에서 1층을 담아본다~~

학창시절 있었던 도고온천역, 지금은 철도노선 변경으로 아산 레일바이크로 바뀌었다

도고온천역 광장

▲ 아산시 선장면

다음은 선장면으로 가서 내가 태어 났던 곳을 살펴보지만 집이 헐려서 찾을 수 가 없었다.

그 당시 살으셨던 노인분한테 물어물어 찾은 곳이 앞에 벽돌 건물 바로 좌측 부분이라고 하신다

이곳은 내가 태어났던 곳 옆쪽으로 가보니 삽교천 옆에 있는 캠핑장이다

삽교천

삽교천

▲ 경기도 수리산역 근처

수리산역 부근까지 와서 누님과 추오정에 가서 추어탕 한그릇을~~

수리산역에 사시는 누님댁을 방문하면 이곳에서 추어탕을 먹곤 했는데 맛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4호선을 타고 서울 집으로~~

오늘 하루 부모님께 성묘드리고 내가 태어난 곳, 어릴때 살았던 곳을

짧은 시간이였지만 보람있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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